
2019년 11월, 영국 유학 시절이었습니다. 런던 외곽의 작은 필름 현상소 앞에서 저는 한 롤을 맡기며 망설였습니다. 한국보다 두 배는 비싼 현상·스캔 비용이 손에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문득 깨달았습니다. 이 망설임이야말로 필름 카메라가 저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라는 것을.
36컷의 무게
디지털 카메라를 들면 저도 모르게 손가락이 빨라집니다. 연사 버튼을 누르고 나중에 그 중 하나를 고르면 된다는 생각이 촬영보다 삭제를 먼저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런데 필름 카메라를 들면 그 흐름이 완전히 바뀝니다. 파인더를 들여다보고, 빛의 방향을 가늠하고, 이 장면이 한 컷을 쓸 가치가 있는지 잠깐 멈추게 됩니다.
교토의 골목에서 저는 하루 종일 여섯 컷밖에 찍지 않은 날이 있었습니다. 이시베코지 돌담 사이로 스며드는 늦은 오후 햇살이 딱 맞는 각도로 들어오기를 10분 넘게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림이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시간 동안 골목의 냄새와 돌 틈에서 자라는 이끼의 질감을 더 오래 느꼈습니다. 36컷을 다 채우지 못하고 하루를 마치는 날이 생각보다 많았지만, 그것이 실패처럼 느껴진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여행에서 필름 카메라를 챙길 때 저는 보통 아래 순서로 준비합니다.
- 여행지의 빛 환경을 먼저 생각합니다. 실내가 많으면 ISO 400 이상 필름을, 야외 풍경이 중심이면 ISO 100 필름을 넣습니다.
- 여분 롤은 두 개 이상 챙깁니다. 현지에서 구하면 비싸거나 종류가 제한됩니다.
- 카메라는 항상 가방 바깥쪽에 넣습니다. 꺼내기 번거로우면 결정적인 순간을 놓칩니다.
필름 그레인이 만드는 질감
대만 지우펀의 골목을 저는 두 번 갔습니다. 처음에는 스마트폰으로 찍었고, 두 번째에는 필름 카메라만 들고 갔습니다. 두 방문에서 찍힌 사진은 같은 장소인데도 전혀 다른 기억처럼 느껴집니다. 스마트폰 사진은 선명하고 정확하지만 그날의 습한 공기, 계단 위로 번지던 홍등 빛의 번짐이 담기지 않았습니다.
필름 특유의 그레인은 단순한 노이즈가 아닙니다. 빛이 필름 유제에 닿으며 만들어내는 입자의 분포가 사진 안에 시간의 결을 새겨놓는 느낌입니다. 특히 흑백 필름의 계조는 디지털로 재현하기 어렵습니다. 하이라이트가 서서히 날아가면서도 그림자 부분에 디테일이 남아 있는 그 농도의 범위가, 화면이 아니라 인화지 위에서 볼 때 더 깊게 느껴집니다. 밴쿠버의 겨울 항구를 흑백 필름으로 찍었을 때, 현상된 사진 속 파도의 거품이 마치 만질 수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영국에서 현상비가 비쌌던 것이 오히려 제 사진을 바꿔놓았습니다. 한 롤을 맡기기 전에 정말 이 사진들이 현상할 가치가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게 되었고, 그렇게 신중하게 찍힌 롤에서 마음에 드는 컷이 훨씬 많이 나왔습니다. 돈의 무게가 시선의 밀도를 높인 셈입니다.
마음가짐이 사진을 만든다
어떤 보도사진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는 기술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결정의 순간 때문입니다. 셔터를 누른 사람이 그 장면의 어떤 것에 반응했는지가 사진에 남습니다. 저는 필름 카메라를 들 때마다 그 감각을 조금 더 의식하게 됩니다. 기술적으로 완벽하지 않아도 됩니다. 초점이 약간 흔들려도, 노출이 조금 어두워도, 그 장면을 찍어야 했던 이유가 사진 안에 있으면 충분합니다.
화담숲의 늦가을, 안개가 내려앉은 연못 앞에서 저는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필름 카메라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을 버티며 안개가 움직이는 것을 지켜봤습니다. 결국 셔터를 누른 것은 안개가 연못 수면에 거의 닿을 듯 내려앉은 순간이었습니다. 디지털이었다면 처음부터 십여 장을 찍고 이미 다음 장소로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필름 카메라는 느립니다. 그래서 여행을 느리게 만듭니다. 저에게 그 느림은 낭비가 아니라 여행의 감각을 더 오래 붙잡아두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요즘은 레트로가 유행이라 필름 카메라를 찾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유행으로 시작해도 괜찮습니다. 한 롤을 다 쓰고 현상소에서 봉투를 받아드는 순간, 왜 이게 단순한 레트로 감성이 아닌지 느껴지실 것입니다. 그 봉투 안에는 촬영 당시 저의 망설임과 결정과 기다림이 함께 현상되어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여행에 처음 필름 카메라를 챙긴다면 어떤 기종이 좋습니까?
A. 조작이 간단한 컴팩트 필름 카메라를 추천합니다. 캐논 슈어샷 계열이나 올림푸스 뮤 시리즈는 자동 초점으로 입문하기 좋고 가볍습니다.
Q. 여행지에서 필름 현상은 어떻게 합니까?
A. 현지 현상보다는 귀국 후 국내에서 맡기는 것이 비용이나 의사소통 면에서 편합니다. 필름은 직사광선과 고온만 피하면 여행 기간 중 보관이 가능합니다.
Q. 흑백 필름과 컬러 필름 중 여행에는 무엇이 낫습니까?
A. 여행지의 색감과 분위기를 담고 싶다면 컬러를, 빛과 구도, 피사체의 표정에 집중하고 싶다면 흑백을 추천합니다. 저는 두 롤을 모두 챙기는 편입니다.
Q. 필름 카메라를 가지고 비행기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도 됩니까?
A. ISO 800 이하 필름은 일반 엑스레이에 여러 번 통과해도 큰 손상이 없지만, 고감도 필름은 수동 검사를 요청하는 것이 안전합니다.